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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것저것

세키가하라 전투의 자세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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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의 상세 이야기

일본 전체의 다이묘들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벌인 전투로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장악에 도쿠가와 막부를 세우게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이 중앙집권 성향의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도요토미 정권의 두 핵심축인 문치파와 무단파 사이의 갈등이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에 센고쿠 시대의 어지러운 정세를 평정하고,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아주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 지방의 다이묘의 영지에 관리자를 파견해 농지의 면적과 수확량등을 조사하였고, 그자료를 기반으로 도요토미 일가의 토지에 대해 조세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집권 정책의 유력한 핵심 참모 역할을 자처했던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같은 문치파들의 세력이 커질수 밖에 없었고, 중앙집권 정책을 강력히 펼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정권에 불만을 품은 지방의 다이묘들과 갈등이 생길수 밖에 없던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두 집단의 갈등은 임진왜란을 치루는 과정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특히 전쟁의 방법을 가지고 갈등이 심했는데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의 무단파 장수들과 고니시 유키나가·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문치파 장수들과 세부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갈등을 겪었고, 그 두 집단의 대립은 울산성 전투와 강화교섭 과정을 거치면서 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두 집단의 갈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의 권력에 억눌려 심각한 문제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6세의 나이로 일본은 통치하는 자리에 앉게 되자 두 집단의 갈등은 도요토미 정권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로 떠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 자신이 죽기 전에 '5대로','5봉행' 이라는 인사제도를 도입해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게 만들었다. 이 중 '5대로' 가운데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 지방을 중심으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다이묘 였다.

 

그래서 문단파 중에 내정을 주도했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마에다 도시이에 등 나머지 4대로들과 동맹을 맺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으며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문단파와 대립을 하던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무단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돈 관계를 맺음으로써 연합하여 대응하였다.

 

1599년 4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5대로 체제의 멤버로 활동하였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갑작스레 죽게되자 가토 기요마사 등 7인의 무단파 장수들은 오사카 성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겨우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도움을 받아 후시미 성으로 탈출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를 받아들여 권력의 지위에서 물러나 사와야마 성으로 은거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갑작스레 실각하게 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급진세력으로서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599년 10월 오사카로 오게되어 정무업무를 담당하게되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파를 오사카 지방에서 추방하였고, 전쟁에서 승리한 다이묘에게는 도요토미 일가가 직할지로 삼았던 영토를 되돌려 주며 민심과 군심을 동시에 얻게 되었다.

 

1600년 7월 26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키 가게카쓰의 모반을 진압하기 위해 아이지 지방의 정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아이즈 지방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이 틈을 타 사와야마 성에 은거하고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마침내 8월 21일, 오사카 성을 함락 시킬수도 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8월 25일, 도쿠가와 이에야스 탄핵안을 다이묘들에게 공포했다. 다음날에는 도리이 모토타다가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을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았으며 9월 8일 후시미 성을 함락시킨 뒤에는 이세 국·미노 국 방면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즉각 대노하며 아이즈 정벌을 중단하고 9월 1일 오야마 성에서 무단파 다이묘들과 동군행을 결성했다. 그리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셋째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나카센도 방면으로 진군시키고, 자신은 도카이도 방면으로 진군해갔다. 

 

하지만 배후에서 히타치 국의 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성으로 가게 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도카이도 방면으로 진군하던 동군의 선봉을 이끌고 기요스 성으로 달려갔으며 때 마친 서군이 장악하고 있던 미노 지역으로 당당하게 혼자 쳐 들어가 9월 30일 기후 성을 점령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0월 20일 자신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미노 국 오가키 성 인근에 아지트를 차렸다.

한편, 문단파의 대표였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가신인 시마 기요오키 등을 보내 동군의 부대를 기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고, 세키가하라로 이동해 동군과의 결전에 대비했다.

 

10월 2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장으로 이끄는 '동군'과 문단파를 중심으로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끌었던 '서군'은 각 10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세키가하라 평지에서 모여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초기 전투에서는 세키가하라 평지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이 유리하였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배반하게 되어 문단파 세력의 중심이었던 오타니 요시쓰구의 부대가 괴멸되다 시피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서 모든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끌던 동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침내 10월 23일이 되어서야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문이 지키던 사와야마 성을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결국 11월 6일 교토에서 잡히게 되어 처형당하게 되었으며 군대를 일으켰던 우에스기 가게카쓰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했다.

 

그 뒤 오사카로 입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에 참여했던 다이묘들에게 영지를 몰수하거나 축소하는 등의 처분을 내리고, 동군에 참여한 다이묘들에게 전공에 따라 그 영지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도요토미 일가가 다이묘들의 영지에 지분을 가지고있었던 토지를 모두 무장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도요토미 일가가 세습하였던 간바쿠 직위를 예전처럼 5섭가에 돌려줌으로써 신망을 얻었다.

 

하지만 이로인해 도요토미 일가는 수 많은 다이묘 가운데 하나로 지위가 낮아지게 되었다.

그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세이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의 지위에 올라 에도 막부 정권을 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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